7. 어느 선생님의 지극히 개인적인 불평
나는 대체 이 직업의 무엇이 그렇게 싫은 걸까?
수학여행을 인솔하러 갔다가 기념품 가게 주인에게 학생 취급을 받은 적이 있다. 체험학습을 인솔하러 갔는데 내가 아니라 옆에 계시던 학부모님(인솔 도우미)이 선생님으로 오해받은 적이 있다. 교실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선생님은 안 계시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운영위원장에게, 배움터 지킴이에게, 다른 선생님에게 인사했는데 "어, 그래. ......! 아, 죄송해요. 학생인 줄 알았어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운동회 연습을 지도하다가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 틈에 있는 나를 학생으로 오해한 옆 반 선생님에게 등짝을 맞은 적이 있다.
길을 가다가 같은 학교 선생님, 예전 학교 선생님, 대학 때 알던 사이인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길을 가다가 우리 반, 다른 반, 다른 학년, 작년 우리 반, 재작년 우리 반, 몇 년 전 우리 반 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길을 가다가 우리 반, 다른 반, 다른 학년, 작년 우리 반, 재작년 우리 반, 몇 년 전 우리 반 학생의 학부모를 만난 적이 있다.
마트에서도, 카페에서도, 편한 차림일 때도, 데이트 중일 때도, 일은 싹 다 잊고 쉬고 싶을 때도 예외는 없었다. 만나면 반갑다. 하지만 마주친 선생님의 성함이나 학생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때, 누구 어머니인지 기억나지 않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이란.
은행 업무를 보러 갔는데 은행원이 나를 알아볼 때,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나를 알아볼 때, 약국에 갔더니 약사가 나를 알아볼 때의 놀라움도 만만치 않다.
아빠는 도대체 네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렇게 떳떳하지 못하냐고 한다. 나는 단골 가게 주인이 알아봐 주는 것도 불편하다. 시도 때도 없이 갑작스럽게 겪는 이런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은 더더욱 원치 않는다.
졸업한 제자가 찾아오면 반가울 줄 알았다. 물론 반갑다. 그런데 두렵기도 하다. 사실 두려움이 더 크다. 얼굴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머리가 더 굵어진 제자가 내 가면을 알아채고 '너도 별거 아니었구나' 할 것이 두렵다. 원래도 나보다 컸지만 이제는 훌쩍 커버린 제자, 통제 밖인 졸업생들을 대하는 것이 어렵다.
나도 학교 가기 싫은데 학교 다니기 싫다는 학생을 학교 다니고 싶게 만들어야 할 때 어렵다. 나도 죽고 싶은데 죽고 싶다는 학생을 살고 싶게 만들어야 할 때 어렵다.
아이는 귀엽다. 어떤 아이는 귀엽다. 하지만 아이'들'은 귀엽지 않다. 지나가는 아이만 보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던 시절은 금방 끝났다.
아이들이 싸우는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다. 서로에게 짜증 내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그동안 만난 아이들이 모두 그렇게 심하게 싸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한 해만으로도 충분히 많이 괴롭다. 한 해만으로도 충분히 질려서, 다음에는 어쩌다 한 번 싸우는 소리만 들려도 진절머리가 난다.
아침 자습 시간, 쉬는 시간, 점심시간, 수업 시간에 싸우지 않고 운 좋게 넘어갔어도 끝난 것이 아니다. 전담 선생님(담임을 맡지 않고 영어, 체육 등 특정 교과를 담당하여 여러 학급에서 수업하시는 선생님) 시간에 싸우고, 방과 후에 싸우고, 일요일에 싸운다. 친구를 괴롭히거나 싸우지 않도록 30명의 아이를 365일 24시간 담임선생님 혼자 감시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하지만 내 수업 때 일어난 일이 아니어도 담임은 나니까, 학교에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학교 다니는 아이들끼리 그런 거니까, 결국은 내 몫으로 돌아온다. 방금 싸우고도 금세 풀어져 같이 노는 아이들 싸움이 부모나 조부모의 싸움으로 번지기라도 하면 정말 곤란하다.
그러다 선생님이 무섭지 않아서 아이들이 싸우고 서로 괴롭히는 거라고 항의하는 학부모를 만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내가 무섭지 않은데 왜 아이들이 내가 없을 때만 서로를 괴롭힐까? 소리라도 질렀다간, 몸에 손끝이라도 댔다간, 벌이라도 줬다간 아동학대로 신고할 거면서 대체 어떻게 더 무섭게 해 달란 말인가? 부모님 말씀도 안 듣는 아이들에게.
하지만 꿋꿋이 무섭게 소리 지르는 선생님과 그렇게 했을 때 잘 따르는 아이들을 보면, '내가 뭐하러 굳이 욕먹어가며 학생들을 존중하겠다고 고생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교생 실습 때 만났던 아이들이 "지금처럼 하면 안 되고, 무섭게 해야 해요"라며 내게 조언하던 일도 떠오른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며 매일을 살고 있지만,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전담 선생님이 우리 반 수업 태도가 좋지 않다고 고통을 토로하며 지도를 부탁할 때나, 우리 반 학생이 다른 반 학생을 괴롭혀 조율이 필요할 때가 있다. 자녀가 말썽부렸다고 주변에서 항의하면 부모님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다. 하지만 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다. 나는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아이는 우리 반 아이이다. 우리 반 아이. 열 번 속을 썩여도 열한 번째에 나아진 모습이 보이면, 그동안 나는 만신창이가 됐어도, 다 용서가 되는 우리 반 아이.
1년을 함께 한 아이들과 매년 헤어져야만 하는 것이 아쉽다. 교직 생활을 버티기 위해 일부러 더 정 붙이려 애쓰다 보니 막상 헤어질 때는 굉장히 섭섭하다.
게다가 매년 정든 아이들을 보내고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야 하는 것이 너무 허무하다. 2월이면 학급 규칙이 대개 습관으로 자리 잡고, 선생이나 학생이나 서로를 파악했기에 생활이 무척 매끄럽다. 학년말이면 학생들이 해이해져서 더 말썽부린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지만, 지금까지는 다행히 2월이 다가올수록 모두 생활 태도가 더 좋아졌다. 열심히 지도하여 목표를 이룬 것 같아 뿌듯했다.
하지만 금방 사라져 버린다. 그게 문제다. 종업식 혹은 졸업식 한 번이면 끝난다. 몇 주 뒤에 3월이 오면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허무해 하지 않고 보람을 느끼려 애를 써봐도 그렇게 '느낄' 수가 없다.
생활 태도가 많이 개선되어 2월에는 기특했던 아이인데, 3월이 되어서는 다시 전처럼 행동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동안 내가 뭘 한 건지 모르겠다. 온 힘을 다해 산꼭대기까지 기껏 바위를 올렸더니 곧 땅으로 굴러 내려가 버리는, 그런데 그 일을 영원히 반복해야만 하는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가 생각난다.
하버드에서 레고 조립으로 실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레고 장난감을 조립하면 돈을 주기로 하고, 레고 조립을 좋아하는 사람을 모집했다. 조립을 계속할수록 받는 금액은 줄어들고, 만들다 보면 부품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미 만든 레고를 분해할 수도 있다고 미리 안내했다.
자신이 만든 레고가 분해되는 모습을 직접 보지 않은 참가자들은 평균 15달러를 벌었다. 그런데 분해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참가자들은 평균 7달러밖에 벌지 못했다. 더 일찍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일의 의미, 성취감을 뺏은 것 외에 실험 조건은 동일했다.
실험이 끝나고 여전히 레고를 좋아하는지 물었을 때도 일의 의미를 박탈당한 참가자는 앞으로 더는 레고 조립을 하고 싶지 않다고 응답했다. 일의 의미와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자 흥미를 잃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내게는 시시포스, 하버드 실험의 두 번째 참가자, 초등학교 선생님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어떻게 꾸역꾸역 참아가며, 연기도 해가며 버텼다. 그랬더니 해가 갈수록 실력이, 전문성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성과가 더 안 나오게 되었다. 수업 시간에 업무를 처리하는 잔기술만 늘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강도의 자극이 계속되니, 있던 힘마저 고갈되었다. 힘이 넘치는 많은 아이들 앞에서 나는 무력하다. 아이들은 터무니없이 강하고, 나는 형편없이 약하다.
그렇다면 그만두는 게 맞지 않을까?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이 튼튼하고 안전해 보이는 밧줄이 사실은 내 목에 매여있는 거라면, 발밑에 뭐가 있는지 내가 얼마나 높이 매달려 있는지 모르더라도, 일단 줄부터 끊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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